히로시마평양 

 

INTRODUCTION

「히로시마·평양 버려진 피폭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에 사는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를 다룬 영화이다. 지금까지, 「피폭자」「원폭」에 관한 영화는 많이 제작되어 왔지만, 북한에 거주하는 피폭자를 다룬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평양에서의 촬영은 북일관계가 최악이었던 08~09년 동안 총 3회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주인공 가족의 아파트, 피폭자를 치료하는 병원과 온천 요양소, 그리고 군사적 요건으로 접근이 어려운 해안가 등, 외국 미디어에게는 그 동안 거의 허가되지 않았던 장소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 아니, 일본인이 북한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촬영을 하는 것 자체가 처음일 것이다.

 

이토감독은 지금까지 북한에서 만난 피폭자 12명 중 리계선씨에 집중해서 이 영화를 촬영했다. 그 큰 이유는 그녀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일본어를 지금도 능숙하게 구사하기 때문이다. 통역을 통하는 것보다도, 피폭자가 일본어로 직접 일본관객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그들의 마음을 전달하는데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선에서 사는 어떤 한 서민이, 본인이 살아온 인생, 그리고 지금의 생활이나 생각에 대해 외국인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솔직하게 말한 적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재북 피폭자를 주제로 영화를 어떻게 찍을까? 이토감독은 리계선씨 가족의 일상생활에 깊게 들어가면서, 방사선 후유증으로 괴로워하는 피폭자의 모습, 일본 정부로부터 계속 방치되어 온 재북 피폭자들의 분노와 슬픔을 찍었다. ,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이웃나라이면서 긴장상태를 풀지 못하고 있는 비정상적 북일관계에 대해서도 영화에 담았다.

 

2010년은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지고, 조선이 해방된 지 65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일본은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아직도 풀지 않은 각종 문제를 안고 있다. 일본사회가 과거의 전쟁, 조선 지배, 원폭에 대해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으로부터, 일본과 동아시아 평화와 안정이 시작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큰 파도를 일으키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이 영화를 제작했다. 어떻게 파도칠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STORY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수도, 평양에서 사는 리계선씨. 이중으로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한다. 손가락 피부가 너무 약해 맨손이면 금방 출혈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버린 적도 있다. 피폭이 원인이라고 계선씨는 말한다.

히로시마시(廣島市)에서 약27km 떨어진 오타케시(大竹市)에서 계선씨 가족은 살고 있었다. 1945 815일 일본은 패전. 조선에 귀국하기 위한 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들 듣고, 어머니는 계선씨를 데리고 히로시마시에 갔다. 그 날은 미군으로 인한 원폭투하에서 12일 지난 날이었다. 히로시마 시내는 아직 잔류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수당지급은 거짓말이었고, 결국 어머니와 딸은 피폭되고 말았다.

 

귀국을 포기한 계선씨 일가의 일본생활은 가혹했다. 계선씨는 대학진학을 희망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마침 북한 귀국사업이 시작되었다. 계선씨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가족을 두고 혼자 바다를 건넜다.   

 

결혼 후, 계선씨의 건강상태는 차차 악화되었다. “자신의 건강을 좀먹는 원인은 피폭 때문이 아닐까” 라는 의문을 가진 것은 2004. 히로시마에서 찾아온 어머니가, 병으로 괴로워하는 딸의 모습을 보고 당시 히로시마에서 피폭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피폭으로부터 5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때까지 어머니가 침묵했던 것에는 깊은 이유가 있었다.  

 

히로시마와 평양에서 각각 멀리 사는 어머니와 딸... 계선씨는 본인이 피폭한 당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제재조치로 인해 북한과 일본을 왕래했던 배는 운행 정지되었고, 어머니의 발길은 끊어졌다. 만날 수 없는 상황 속에 피폭자인 어머니와 딸은 서로의 건강을 염려한다. 그리고 영화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말로 끝난다 

 

 

PRODUCTION NOTES

 왜 재북 피폭자를 찍었는가? 

 

내가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한 것은 1992. 일본으로 인한 조선지배의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아시아태평양 나라들을 수십번 취재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백상태였다. 이 나라에 대해서 아무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무섭고 떨리는 마음에 흠칫흠칫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북한을 몇번씩 방문하게 되었고 다양한 취재를 통해 잡지, TV, 서적 등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일본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는 “재북 피폭자” 를 다루는 영화를 찍기로 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자 중에서 일본정부에서 아무 조치를 받지 않는, 바꿔 말하면 “버려진 피폭자”가 “재북 피복자”이기 때문이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자와의 재회  

 

이 영화를 위해 히로시마와 평양에서 찍은 영상은 약 100시간. 그 중에서 꼭 다루고 싶은 부분을 택해서 편집해도 150분이 넘는다. 그래서 상당한 고생과 함께 영상을 더 줄이는 작업을 했다.

 

어쩔 수 없이 자른 영상 중에서, 꼭 소개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다. 리계선씨는 히로시마현 내 중급학교(중학교)를 졸업하고, 후쿠오카현 “큐슈 조선중고급학교”에 진학했다. 계선씨 처럼 집이 멀어서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계선씨는 그 기숙사에서 나가사키에서 피폭한 박문숙씨를 만났다

 

박문숙씨는 “귀국사업”으로 1959년에 북한으로. 그리고 계선씨는 그 다음해에 귀국선을 탔다. 박문숙씨는 1995년 평양에서 피폭자단체가 결성된 당시부터 선두에 서서 활동했다.

 

계선씨가 본인이 “피폭자”라는 사실을 어머니로 부터 들은 것은 2004. 그 다음해에 개최된 국제회의에서 계선씨는 피복자로서 증언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계선씨는 얼굴 익은 박문숙씨를 만났다. 46년만의 학우와의 감동적인 만남이었다. 계선씨가 본인의 피폭 사실을 알지 않았다면 이 만남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그들은 제일 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서민들과 노래하며 춤춘다 

 

계선씨 가족의 휴일을 촬영하기 위해 평양시 교외 행락지로 향했다. 가족 일행이나 젊은 사람들이 고기를 구워먹으며 술을 즐기고 있다. 모두 너무 흥겨운 분위기다

 

그들에게 카메라를 향했더니, 많은 이들이 나를 환영한다. 맥주나 소주를 큰 사발에 남실남실하게 따르며 “마시라”고 권유한다. 이럴 때를 위해 평소 술 마시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 여기에서도 도움이 되었다.

 

술 마신 다음, 처음 보는 이들과 함께 노래하며 춤추었다. 북일관계가 최악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내가 일본인이라고 알면서도 이렇게 환영해준 것이다. 이 장면도 생략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

 

  9분의 노컷 

 

대담하게 자르는 작업의 반면, 영화 전체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9분 동안의 노컷을 넣다. 계선씨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비디오 레터 부분이다.

 

촬영 전부터 이 부분은 자르지 않을 작정이었다. 내가 젊었을 때 ‘테오 안게로프로스(Theo Angelopoulos)의 “유랑연예인의 기록 (The Travelling Players)”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TV 다큐 제작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노컷이라는 수법을 이 영화에서 써보고 싶었다.

 

사실, 수록한 계선씨 비디오 레터는 두 개이다. 계선씨는 머리에서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이야기했지만 너무나 길었다. 그래서 계선씨에게 짧게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두 번째 찍은 3분짜리에는 전혀 감정이 들어있지 않았다. 계선씨는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9분 것을 쓰게 되었다.  

  

이 “비디오 레터”에 대해서 일본인과 재일 코리안(korean)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 “너무 길다”는 의견은 일본인들의 의견이다. “길어도 괜찮다” “기니까 더 잘 전달된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대부분 재일한국인(korean)들이다. 그것은 18세 때 가족과 헤어져 평양에서 사는 계선씨의, 히로시마에 계시는 어머니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마치 나의 문제로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  

 

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3번에 걸쳐서 북한에서 촬영했다. 마지막 촬영은 2009 4. 그 촬영을 마친 직후, 영화 내용을 크게 좌우하는 예상하지 못한 대사건이 일어났다.

 

북한에서 촬영은 쉽지 않다. 촬영 허가를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고, 아무리 교섭해도 허가를 받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리고 촬영이나 체류에 따른 경비가 비싸다. 그래서 다시 북한에 가서 추가 촬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구성안을 변경하지 않고 편집하고 ‘사건’ 부분을 마지막에 덧붙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영화 끝 부분에서 관객에게 큰 충격을 줌으로써 ‘재북 피폭자’가 놓여 있는 어려운 상황에 대해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건’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신 분은 영화를 꼭 보셨으면 한다.

 

감독 : 이토 타카시

영화 완전수록 시나리오는, 영화와 같은 제목으로 서적 “히로시마, 평양 버려진 피폭자”(이토타카시, 후바이샤(風媒社)에서 수록.

 

 

2009 / 90

감수:이실근 / 낭독:아라야 에이코 / 음악:하홍철 / 편집:츠치야 토카치, 코바야시 아츠시

기획·구성·촬영·감독 : 이토 타카시

제작·배급:히로시마·평양 제작위원회

선전(도쿄공개):브라우니



예고편
히로시마・평양



기사

OhmyNews(2011・8・11)

한겨레 2011・8・6



영화제 상영


= 국내 =

후쿠오카 아시아 영화제 2010           2010 7 2~11

후쿠오카 아시아 영화제 2010 사전행사    2010 5 29

히로시마 평화영화제 2009       2009 11 20~12 11

안녕 전쟁! 영화제      2009 12 12


= 해외 =
하트・오브・잉글랜드 국제영화제    2011 9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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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그린・다큐멘터리 영화제      2010 10 12~16
남 유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2010 9 16일~25
아일랜드 국제영화제     2010 9 4~11   다큐멘터리(국제) 부문상 노미네이트